일정관리앱이라던가 그런 진보적인 도구는 써본 적 없어요. 시스템다이어리 같은 것도 써본 적 없어요. 아니, 다이어리 자체가 없어요. 모든 업무 관리를 컴퓨터로는 메모장, 연필로는 책상 위에 돌아다니는 메모지로만 해요. 워드, 엑셀도 안 써요. 그런데 사실 그게 저한테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때의 핵심이에요. 만일 라면을 끓이는 프로젝트를 한다면, 체크리스트나 일정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은 라면을 산다 - 물을 끓인다 - 라면을 넣는다 뭐 그런 여러 개의 일들을 기록해 놓고 하나씩 해 나가겠지요. 더 디테일한 사람은 가스밸브를 연다 - 가스를 켠다 -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가른다 까지도 주요 일정의 하나로 적어놓을 거예요. 근데 저는 그런 프로젝트를 맡으면 그냥 메모장에 '끓인라면'이라고 딱 한 줄 적어놔요. 여러 일을 하다 보니까 그런 게 여러 개 적혀 있지요. 그리고 그중에 다 된 일이 있으면 찍 한 줄 그어버려요. 그 메모장은 매우 심플하지만 아주 심각한 워닝을 해요. 한 달 내내 바빴는데 그 메모장에 적힌 것들이 하나도 지워지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그럼 아무것도 못한 거예요. 아주 간단해요. '된 것' 아니면 '안 된 것', 노력한거, 시도한 것, 실행착오한 것, 길을 잘못 들어 돌아온 것, 이런 건 모르겠고 그 메모장엔 그래서 그게 됐어? 안됐어? 밖에 없어요. 설마 그러겠나 싶겠지만, 어떤 사람들을 보면 라면을 사고 가스를 열고 물을 끓인 뒤 후아, 많은 일을 했구나라고 스스로 생각하곤 해요. 자부심도 느끼고, 혹은 일이 많다고 불만도 하고. 꼼꼼한 계획서를 써서 해 나가다 보면 진짜 뭔가 한 칸 한 칸 해 나가는 중이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가스는 열었고 물은 끓였고, 장하게 해냈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다가 결국 라면이 끓여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 프로젝트를 그런대로 해냈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라면에 비교해서 그렇지 진짜 프로젝트들 중에는 저런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우산이 팔리지 않아 망한 상점도 물건을 기획하고 만들고 나르고 포장하고 마케팅하고 어마어마한 일들을 각자 나름 종료했을 것 아니예요. 사장 메모장에 '우산판매'라고 한 줄을 적어놓았다면 그 줄 하나를 못 지운 건데. 더군다나 여러 일을 하다 보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그 여러 일 중에 단 하나도 제대로 된 일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메모장에 그 끝만 딱 적어 놓고 일하면 그게 예방되는 편이에요. 몇 년 전 어느 가을 한 주 동안 했어야 할 일을 메모장에 적었던걸 참고하시라고 첨부했어요. 저런식으로 한 일당 딱 한 줄, 다 모아서 딱 한 장, 다른 페이퍼웍은 하지 않아요. 나머지 시간은 저걸 찍 긋기 위해서 뭔가 바쁘게 사용했겠지요. 물론 십 년 전 메모장에 써놓은 건데 아직 못 지운 것도 있어요. 제 메모장에 의하면 그건 하려던 것도, 하던 것도, 준비 중인 것도 아니고 그냥 '결국 아직 아무것도 못한 상태'예요.

-프레인 글로벌 CEO 여준영